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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가라데의 이야기

극진의 정신과 극진가라데의 역사!!

극진의 정신!!!!



고 최배달(최영의) 총재님이 창시 하신 '국제공수도 연맹 극진회관'은 

강함 만을 추구 하지 않습니다.


총재님의 어록중에 '무도의 완성은 인격의 완성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극진가라데의 수련속에는 많은 철학이 담겨 있으며 그에 기본인 '극진 정신'에 대해 설명 하겠습니다.


극진이란 ' 천가지의 일을 두고 처음 먹은 마음으로 하고, 만가지의 일을 두고 최대의 힘을 쏟아 이룬다' 라고 말하는 

무도의 격언으로 부터 발표한 명칭입니다.


완성은 없다고 말해질 정도로 엄하고 험한 무도의 진수를 궁극으로 하는 뜻입니다.

이는 국제공수도 연맹 극진회관에 전통적으로 계승해지고 있는 정신입니다.


'머리는 낮게 눈은 높고 삼가 마음넓고, 효를 원점으로서 다른 이들을 이롭게' 

이란 창시자인 고 최배달 총재님 자신이 오랜 세월의 엄한 수행의 인생중에서 확립한 극진 정신입니다.


또 한편으로 극진의 정신 속에는 사랑으로 살피는 압인(忍)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 정신 속에 존경, 감사, 인내의 의미가 깊이 베여 있습니다.


심신을 연마하는 것과 동시에 전통과 예절을 중요시 하는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의 정신 수행이 실생활에 살려질때 

진정한 무도인으로 거듭날수 있음을 극진 정신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진가라데의 역사!!




가라데의 기원을 알아 보고자 한다면 기원전 3000년경 한창 부흥기를 구가하던 고대 인도의 '권법(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고대 인도에서 부흥기를 누리던 권법은 그이후 불교의 보급과 더불어 아시아 전역에 걸쳐 두루 분포하고 있던 격투기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당초 맨손 권법은 전장에서 전투 수단으로 이용 되었지만, 무기와 전술의 급격한 발달에 따라 서서히 호신술로써의 색채가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 발달한 '남권(拳)'과 오키나와에서 보급된 '테()'와 '당수(手:토오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들권법이 일본 본토에 전래된 것은 1920년 이후 무렵입니다.

일본 본토로 전래된 당수는 '카라테'로 불려졌으며 1929년에 이르러서 정식으로 한자 명칭도 '카라테(手)'로 통일 되었습니다.


원래 '카라테'라고 하면, 당초에는 기술을 상대의 몸 앞에서 멈추는 슨도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이른바 '풀컨택트(직접타격제)'룰은 금기시 되어 왔습니다.


이미 슨도메 룰이 상식으로 통용되어 오던 일본 가라데계에 있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극진가라데의 창시자인 최배달 총재'였습니다. 


육체적인 단련과 정신 수양을 위한 입산수행, 성난 황소와의 혈투, 미국 여행길에서 겪어야 했던 프로레슬러와 복서를 상대로 한 이종격투기 등등, 최배달 총재의 무용담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후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소수정예로 대산 도장을 열었던 최배달 총재는 

마침내 1964년 동경 이케부쿠로 본부도장을 개설하고,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을 창설합니다.

이로써, 극진가라데의 국내외 보급을 위한 교두보 구축이 확립된 것이 었습니다.


                                                                              (사진 샘플)


그리고 1969녕에 이르러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선수권대회'를 개최합니다.

사상 최초로 풀컨택트 룰에 의해 진행된 토너먼트 대회는 타유파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문호를 개방하는 극도의 자신감과 참신한 룰로 인해

당시의 일본 무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켰으며 세간에는 두고두고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최배달 총재와 극진가라데의 역사는 극화 '공수바보일대(강남사 출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만화를 읽은 젊은 독자들이 감도을 받아 '격투가'의 꿈을 안고 극진가라데에 입문 한것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을 정도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후 극진가라데는 착실하게 그리고 확실히 해외 각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975년 부터 4년에 한번 '오픈 토너먼트 전세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으며 또한 한편으로 경기화가 진행됨에 따라 1984년 부터는 1년에 한번 '전일본 웨이트제 선수권대회'를 출범 시켰습니다.




1994년 4월, 최배달 총재는 70세에 서거 했지만, 이미 그 뿌리를 단단하게 다진 극진가라데는 오늘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그해 최배달 총재의 유지를 이어 받아 '제 4회 전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자였던 문장규(마쓰이 쇼케이)씨가 

국제공수도 연맹 극진회관의 2대 관장으로 정식 취임합니다.


2대 관장으로 취임한 문장규관장은 최배달 초앶의 유업을 이어 '지상최고의 가라데'를 목표로 후진의 지도와 극진가라데의 확대보급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97년 4월에는 첫 시험무대로써'전세계 웨이트제 선수권대회'를 개최 했습니다.


또한 99년 가을에 열렸던 '제7회 전세계 선수권대회'에서는 프란시스코 휘리오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의 세계왕좌 등극'이 실현되면서 신문지상과 매스컴을 통해 대서 특필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극진가라데의 실전성은 k-1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극진회관 출신의 앤디 훅 선수와 휘리오 선수, 그리고 노지 류타 선수의 킥복싱 무대 진출등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극진회관에서는 이렇듯이 실전적인 측면을 증명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으로 허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약자를 포함한 일반일들에게도 문화를 개방하기 위해 수련중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안전 사고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도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극진가라데'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상 극진 가라데의 정신과 역사에 대해 적어 보았습니다.

앞으로 차차 여러 소식을 업로드 하겠습니다.




 


忍忍忍忍忍忍